류준열 X 김태리

















[화양연화]

네 옆에서 환했던 나의 날들










윤지수, 33세, 심리상담가





태어나 단 한 번도 축복받지 못한 삶.

 

그가 여자의 뱃속에서 막 자라기 시작했을 그 무렵부터, 그에게는 온갖 소문들이 꼬리표처럼 뒤따랐다. 몸 파는 여자의 아이. 부잣집 첩의 아이. 혹은 강간 피해자가 낳은 아이. 무엇 하나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 속에서, 여자는 아이를 낳은 그날 병원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안은 채로.


여자는 죽었고, 아이는 살아남았다. 아이를 거둔 여자의 엄마는 살아남은 아이에게 자신의 딸과 똑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너는 목숨이 참 질긴 아이구나. 네 어미의 몫까지 네가 짊어지고 살아라. 그러나 여자의 목숨을 빼앗고 여자의 이름을 가진 아이를 보며, 여자의 엄마는 점점 미쳐갔다.

 

저주와 불행, 그리고 끊임없는 소문들 속에서 아이는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다. 체념에 가까운 삶. 그는 그저 주어졌으므로 살아 숨 쉬었다. 낳아준 이를 원망해본 적도, 살아있음을 후회한 적도 없었다. 그는 딱 주어진 만큼만 살았다. 웃지도, 울지도 않고. 그를 안쓰러워하던 그의 이모가 그를 다시 거둔 덕에, 그는 열다섯이 되어서야 겨우 사람답게 살 수 있었다.

 

대학교 1학년. 해인을 만났다. 해사하게 웃는 얼굴. 웃는다는 건 저런 거구나. 그는 처음으로 해인을 따라 밝게 웃었다. 둘은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다. 해인은 어두운 삶에 위안되는 빛이었고, 빛은 곧 사랑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묻어두었다. 진흙탕 한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자신이 환한 해인을 사랑하는 것은, 어쩐지 죄 같았으므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조용히, 친구로서 옆에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13년이 훌쩍 지났다.

 

불행을 먹고 자란 아이는 타인의 불행을 안아주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아이는 시간이 흘러 자신이 꿈꾸던 어른이 되었으나, 정작 자신의 마음은 어찌 할 줄 몰랐다. 평생을 견디고 받아들이며 살아온 삶이라, 이 마음도 견딜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요즘 자꾸, 해인의 눈을 보는 것이 힘들다. 연애 안하냐는 해인의 물음에 웃어넘기기가 더 이상 힘들 때쯤, 해인이 말했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고. 이제는 이 마음을, 끝내야 할 것 같다.











정해인, 33세, 소아과 전문의  


높고 좁은 모래성 위에 서있는 삶

 

반장. 전교 회장. 전교 1. S대 의대 수석 졸업. 지역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유명 독지가의 무남독녀 외동딸. 모두 그녀를 둘러싼 수식어들이었다. 모두들 그녀를 좋아하고 부러워하고 따랐지만 정작 그녀의 부모는 그 모두에 해당되지 않았다. 그녀가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부모의 사랑이 고팠던 어린 아이의 등 뒤로 들려오던 잦은 한숨. 그녀의 부모는 아이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만 지킬 뿐이었다. 자신을 낳은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그녀는 너무 이른 나이에 그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럴수록 더 밝게 웃었고, 뭐든 더 열심히 했다.

 

부모가 후원하던 남자아이들은 자주 집에 드나들었다. 그녀는 한 번도 겪은 적 없던 칭찬들과 사랑 가득한 웃음. 그때마다 그녀는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자신도 부모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작은 기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져갔다. 타인들의 관심과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그녀는 높고 좁은 모래성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파도 한 번에, 바람 한 번에 추락해 버릴 것 같은 두려움. 그녀는 자주 현기증이 일었다.

 

반항하듯 선택한 대학이었다. 거기서 지수를 만났다. 늘 마음속 어딘가 불안한 자신과는 다르게 지수는 단단하게 서있었다. 그가 건네는 사소한 위로들과 칭찬들은 그녀를 모래성이 아닌 단단한 땅 위에 서있게 했다. 그의 곁에 있는 순간에는 더 이상 어지럽지 않았다. 지수는 가장 소중한 친구였고, 또 부모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와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아이를 낳으면 온전한 사랑을 주겠노라 다짐했다. 아이야, 너는 존재 자체로도 나의 자랑이고 사랑이란다. 말해주고 싶었다. 늘 그렇듯 지수에게 가장 먼저 이야기했다. , 결혼하려고. 그 사람이랑. 그런데 요즘 지수가 묘하게 위태로워 보인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딛고 선 단단하던 땅이 일렁였다. 그녀는 다시 어지러웠다. 너는, 정말 괜찮은 걸까?




*



'기집애가 의대가서 뭐하게?

교대같은데 가서 얌전히 학교다니다가

선자리 알아봐줄테니 시집이나 가거라.'






'첫 만남'









"야! 윤지수! 너 수업 몇시에 끝난댔지?"


"오늘 두시. 왜."


"너 수업 끝나고 어디 가지말고 인문관 앞에 딱 서있어.


내가 시간 맞춰서 갈테니까. 알았지?"


"..야. 땡땡이좀 그만쳐라."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어찌 가만히 있을수 있겠소!

이따 봐 안녕!"





 "아 나오니까 너무 좋다 세상에. 으 의대 건물 너무 추워."


"옷이나 좀 제대로 입고 다니면서 춥다는 소릴 해라."





"지수야. 너도 좀 싫은건 싫다고 하고,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살아.

아무도 뭐라할 사람 없어. 어? 임마.

누가 뭐라고 하면 이 누나가 크~으게 혼내줄게! 데려와!"


"..생일은 내가 더 빠르거든."


"아 뭐 어쨌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나 결혼하려고, 그사람이랑.'








'해인의 결혼'





'해인에게.

미안해 말도 없이 떠나게 돼서. 결혼 다시 한번 축하하고.

많이 예쁘더라. 행복하게 살아. 매일 그렇게 환하게. 너는 그럴 자격 있어.

나는... 아마 좀 오래 돌아다닐 것 같아.

해인아. 너는 늘 내게 고맙다고 말했지만, 나는 언제나 네가 고마웠어.

내가 사는건 그저 엄마의 목숨값이다, 생각하고 살았는데.

네 덕에 처음으로 내 삶이 좋았거든. 고마워.

이제 너 없이도 잘 지내보려고.

늘 건강하고. 잘 지내. 안녕.'


나는 끝내 사랑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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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준열 x 이종석 글 수정해서 김태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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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1 이미지 수정



덧글

  • 2016/12/15 13:30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라임 2017/01/01 22:37 #

    댓글 감사합니다! 이제서야 수정을 하네요 죄송합니다^^;;;
  • 2017/02/01 03:18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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